Chang Rae Lee의 ‘The Surrendered’

이렇게 읽기 괴로운 책이 또 있었던가? 끝없는 장면의 묘사, 또 묘사. 책 첫 머리 도입부부터 너무나도 끔찍할 정도로 처절하고 세밀한 그 묘사에 견딜 수 없어 책장 덮기를 몇 번.

아빠와 오빠는 죽음의 장으로 끌려가고 엄마와 언니는 능욕을 당한 후 포격에 사라지고, 이제 동생들을 데리고 기차 지붕에 올라 피난길에 나서는 11살 소녀 June. 하지만, 데리고 가던 동생들마저 결국 급정거하는 기차에서 추락.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극도의 공포 속에서의 Hector와의 만남. 이 Hector는? 어린 시절, 자신의 보호를 받아야만 했던 아버지, 잠깐 곁을 비운 사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그, 그에 대한 자책감에서 자신의 죄 값으로 수난 받기를 자처해 한국전에 자원, 상관폭행으로 불명예제대, 고아원으로 봉사하러 가던 중. 이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틀어놓는 또 다른 사람, 그 고아원 목사의 부인 Sylvie. 그 Sylvie는? 선교사의 딸 그녀. 어린 시절, 만주. 일본군의 고문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겪을 수 없는 수치를 당한 후 죽음을 맞는 부모의 최후 현장을 목격.

작가란 누구인가. 소설이라는 하나의 나름대로의 세계를 열어가는 창조주? 그렇다면 작가 이창래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창조주다. 하나같이 어린 시절 충격적 불행한 사건을 겪어야만 했던, 그로 인해 형성된 성격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불행한 삶을 자초하는 성격파탄자 June 알코올 중독자 Hector 약물 중독자 Sylvie. 그래서 제목이 The Surrendered일까? 운명에 두 손 들고 항복한 존재들,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긴 존재들. 그런 존재와 그 고통 형태의 설정에 그치지 않고, 그 고통의 모습 하나 하나를 극도로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즐기는 창조주.

스토리 라인은 이렇다. 사업에는 성공했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을 등한히 했던 June, 어렸을 적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유럽으로의 뿌리여행을 떠나버린 그의 아들, 말기 암 June, 사람을 고용해 아들의 행방을 찾는 그, 절도와 사기 행적으로 가득한 아들의 인터폴 기록, 자신이 떠나기 전 아들에게 그 죽은 남편이 아니라 진짜 아버지 Hector와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그. 물론 어느 소설에서도 그렇듯 여기에서도 이야기가 단선적으로 밋밋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Hector의 삶, June의 삶, 또 Sylvie의 삶, 또 이들 세 사람 만남의 현장 고아원 시절의 삶. 이 네 개의 이야기 항아리에서 풀어져 나오는 실타래가 얽히고설켜가다, 마치 소설 초반 고아원으로 향하던 Hector와 June의 발걸음이 재현 되듯, 이 두 사람과 Sylvie 또 June과 그의 아들 Nicholas의 상징적 접점이었던 19세기 이탈리아의 Solferino 전투 그 현장으로의 마지막 순례라는 하나의 초점으로 이야기가 모아져 가며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보통의 작가라면 주인공의 긍정적 면을 살려가며 이야기를 이끌어갈 텐데, 여기서는 그런 것 없이 냉혹하다. 거기에 또 끝이 없이 잔인한 창조주 작가. 이야기의 흐름을 그의 의도대로 끌어가려, June이 유럽으로 출발하기 전날 원래의 동행예정자였던 탐정을 '사고 처리'한 후 '최후의 동행인'을 Hector로 대치하고, 나중엔 그 아들조차 얼마 전 교통사고로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by 작은새 | 2011/04/04 08:03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0)

모리무라 세이치의 '인간의 증명'

엘리베이터에서 푹 쓰러지는 흑인. 가슴에 꽂혀있는 칼. 동경에서의 살인사건. 단서는 오리무중. 담당형사의 어린 시절 추억. 승전 미군들의 여성추행 현장에 개입했다 구타와 모멸을 당한 며칠 후 세상을 뜬 아버지. 자녀와의 대화로 유명세를 탄 행복전도사. 묵계아래 연기의 풍족한 대가로 방탕을 일삼는 아들. 교통치사 은폐. 치료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부인을 유흥업소에 보내는 남편. 부인의 불륜과 실종. 수사 중 드러나는 스트로하와 키스미라는 수수께끼 같은 단어. 책 중반쯤에 이르면 어느 정도 짐작케 되는 사건의 윤곽.

하나의 살인사건을 통해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무대를 오가는 이야기로 소설을 쓰며 ‘틈날 때마다’ 드러내는 작가의 미국문화에 대한 경멸감과 일본문화에 대한 자부심. 사실, 작가 森村誠一(1933- )의 개인적 견해라기보다는 우리가 접하는 일본인들로부터 오늘 날에도 쉬 발견할 수 있는 일본인들의 보편적 인식. 동시에, 일본 사회 엘리트층의 위선 고발.

작품 자체는 성급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고 아주 차분한 흐름. 마치 무슨 영화에서처럼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 사실. '등장인물 모두'가 소설 초반 한 날 한 장소 그 장면에 있었던 사람들. 하지만, 너무 작위적이란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하나의 위트처럼 귀엽게 받아들여지는 느낌. 그만큼 스토리의 흐름이 어색하지 않아서라고 할까?

by 작은새 | 2011/03/22 18:11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0)

박범신의 ‘외등’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 시신 신원확인 요청. 이미 서영우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나(재희). 어렸을 적 회상. 엄마 따라 들어간 집. 남매사이이기 이전에 마음 속 사랑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된 오빠 영우. 그 오빠의 마음을 빼앗아간, 세 들어온 서산댁의 딸 혜주. 그 혜주를 탐하는 또 한 사람, 막강한 권력의 부잣집 아들 노상규. 반체제 운동가 서영우는 투옥되고, 혜주는 영우의 석방을 위해 노상규에 기대다 결국 그와 결혼하게 되고, 사랑의 복수에 눈이 먼 노상규에 혜주는 삶 아닌 삶을 살다 결국 감금상태에서 지내게 되었고, 그 혜주를 잊을 수 없는 영우는...

책 초반, 여기 살짝 저기 살짝 치고 나가며 부드러운 긴장감을 일으키는 작가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빈틈없는 짜임새로 흐르는 애잔한 분위기의 나레이션,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완벽에 가까운 그 솜씨에 숨까지 죽이며 빠져든다. 하지만, '그저 또 하나의 진부한 러브스토리'가 될까 걱정이 되어서 그랬을까, 작가 박범신은 여기에 시사성을 부어넣는다. 서영우는 사상범 아버지라는 '원죄'라는 운명을 안고 살아야하는 할 운명의 존재로, 서영우는 친일파의 후손이요 정치군인의 조카요, 정치권과의 결탁으로 승승장구해가는 재벌 집의 후계자로. 혜주는 정신대 고통의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서산댁의 횡포로부터 벗어나길 소원하는 불쌍한 딸로.

내 물론 이 훌륭한 작가의 작품에 이러쿵저러쿵 비판을 가할 수 있는 그런 수준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지만, 그래도, 차라리 중편소설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시사성을 빼는 것이 더욱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진하게 느낀다. 서영우 아버지 이야기에 무슨 실감이 살아나는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영우의 투옥과 고문 이야기에 무슨 분노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서영우의 석방을 위해 혜주가 노상규에게 부탁하다 그와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도, 아무리 그때 어머니의 횡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필연적 진행이라는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내용도 아니니 말이다.

두 사람 결혼 후 그 부분에 접어들자, '섬세한 어루만짐' 작가의 그 솜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치 전혀 다른 작가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든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결말부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생각에 작가의 마음이 급해진 모양일까, 정말 '일품'이요 '완벽'에 가까웠던 그 구성과 표현 또 문장흐름 그 트레이드마크 대신, 방탕한 노상규의 의처증 섞인 복수극이란 그저 평범한 ‘스토리 전개’로 전락하고 만다. 더구나 전반부에 그렇게 애써 '꾸겨 넣었던' 시사성과의 연관성도 느낄 수 없다.

종반부 혜주와 서산댁의 구출작전에 이르자 이야기는 진부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다. 급격한 품질 저하. 사람살이 그 어디에도 마찬가지이듯이 작가가 자신의 진수를 작품에 쏟아 넣을 수 있는 능력 거기에도 한계가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정말로 좀 더 시간을 두고 정성을 더 기울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초반의 기대가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너무 컸던 탓일까?

by 작은새 | 2011/03/20 00:01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0)

'채근담'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나도 유명한' 니체의 책과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홍자성인지 홍응명인지 하는 사람의 책 두 권을 동시에 읽어나갔다. 역사 종교 예술 도덕 삶의 관점에서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대충 시기적으로 전자는 우리 조선조의 전반부에 후자는 조선조 후반부에 해당하지만 당시 동양과 서양 사이에 사상교류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니 어느 정도 동일 선상에 놓고 이 둘의 접근법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느껴보고 싶은 일종의 호기심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니체가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엔 그 역시 '이름 없는 인물' 아니었던가.

마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그 참 모습을 알려드릴 테니.'라는 행사에 다녀온 느낌이다. 방A에 붙은 팻말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이었고, 방B에 붙은 팻말은 '菜根譚: 채소뿌리만 먹고 살아도 그 속에 道와 樂이 있어요.'였다. 방A의 연사 Nietzsche는 스스로를 '자유의지 인간'이라 선언하고, 단어 하나하나에 또박또박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때로는 정곡을 찌르는 간단한 문장 한 방으로 때로는 제법 긴 사설을 붙여가며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설파해나가는 반면, 방B의 연사는 스스로를 還初道人이라 소개하고, '똑 부러지는' 대답 대신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게나.' 하는 식으로 차분한 목소리로 선문답하듯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간다.

방A에는 모든 가식의 굴레를 떨쳐버리고 인간 본질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온 사람의 '진실선언' 그 외침의 분위기로 가득했고, 방B에서는 '오늘'만을 보지 말고 어제를 돌이켜보며 내일의 허무함도 미리 생각해두는 사람만 '진정한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타이름의 사랑방 분위기였다. 무슨 형이상학적 이야기나 허공을 맴도는 도덕적 이야기로 사람들의 시간을 뺏는 대신, 때로는 위트처럼 들리는 신랄한 비판도 마다않고, 때로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식의 깨달음도 들려준다.

그 맛을 알아볼 수 있는 부분 하나씩.

Es ist weit angenehmer, zu beleidigen und später um Verzeihung zu bitten, als beleidigt zu werden und Verzeihung zu gewähren. Der, welcher das Erste thut, giebt ein Zeichen von Macht und nachher von Güte des Charakters. Der Andere, wenn er nicht als inhuman gelten will, muss schon verzeihen; der Genuss an der Demüthigung des Anderen ist dieser Nöthigung wegen gering.(이 독일어는 古語 그대로. 소리 내어 읽으면 마치 무대대사 같은 효과가 난다.)

모욕을 주고 나중에 용서를 비는 편이, 모욕을 당하고 나중에 용서해주는 편보다 낫다. 앞서의 경우에는, 힘이 있음을 보여주고 나중에 성격이 좋음까지 과시할 수 있게 되지만, 뒤의 경우에는 비인간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할 수 없이 용서해야 되는데 바로 그 이유로 상대방의 수치스러워하는 모습을 별로 즐길 수 없게 된다.

怨因德彰 故使人德我 不若德怨之兩忘 仇因恩立 故使人知恩 不若恩仇之俱泯

원한은 덕을 베푸는 과정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내게 덕이 있다고 여기게 하기보다는 덕을 베풀 사람인지 원망할 사람인지 아예 모르게 하는 것이 낫다. 원수는 은혜를 베푸는 과정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은혜를 알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은인인지 원수인지 아예 모르게 하는 것이 낫다.

내가 동양 사람이라서 그럴까? 니체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신경이 곤두서고 스트레스가 쌓여 가는데, 채근담 이야기에는 저절로 그 속으로 녹아들어가듯 편한 마음이다.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책이 있다면 당연히 菜根譚.

by 작은새 | 2011/03/06 23:12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0)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공룡능선 타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다보면, 난 왜 이렇게 듣기만 하는 입장이지 하는 생각도 드는 법. 사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두 권을 Gutenberg Project에서 다운받아 놓은 지는 이미 오래 전. 하지만, 아무리 '이제는' 하는 각오로 아이패드를 펴들어도, 워낙 상징적 문체와 은유적 표현으로 가득한 이 책에 질려, 중간에 포기하곤 하기를 몇 번씩이나. 결국, 순서를 바꾸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먼저 읽어보기로. 차라투스트라와는 아주 대조적인 이 책은 표현이 거칠고 더 직설적이고, 위트도 듬뿍 담겨 장난기조차 느껴진다. 짧은 문장 경구형식으로 가득한 이 책에서 좀 용기를 얻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니체와 좀 친해졌다고나 할까, 어느 날 다시 차라투스트라를 꺼내들고 장난삼아 큰 소리로 읽어본다. 세상에. 이건 철학책도 아니요 산문집도 아니요, 그저 노래집이요 판소리다. 분명 오늘 날 독일어와는 어순도 철자법도 많이 다른데, 오히려 자음의 강약(h 삽입 또는 겹자음)에 길고 짧은 모음이 리듬 치는 '노래 같은 시' 그 자체다.

물론, 그렇다고 그 깊은 뜻이 쉽게 잡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이미 수없이 들어보지 않았던가. 그러자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의 말이, 그의 표현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느껴지기 시작한 것. 마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비록 그 속에 숨어있는 깊은 뜻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미 대충 알고 있는 줄거리에 ‘재미있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손자’처럼 말이다. 때로는 그리스 철학자의 설파를 또 때로는 성경의 산상수훈을 셰익스피어의 대사로 패러디한 듯 착각까지 느낀다. 신은 이미 죽었다. 내세 그런 것은 없다. 죽음은 회귀의 단계일 뿐이다. 육신이 타락의 근원이라는 것은 헛소리다. 몸을 튼튼히 가꾸고, 내면으로부터의 ‘의지’의 소리를 들어라. 이성은 인간의 강한 무기다. 이제 공룡능선 타기는 고통이 아니다. 재미있고 신나는 발걸음이다.

이 책의 핵심개념은 당연히 Übermensch. 하지만, 이 위버멘쉬가 정확히 어떤 존재를 의미하는지 그 구체적 설명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 Übermensch가 신을 대치하는 초월적 존재는 아니라는 것. 또 그렇다고 흔히 번역되듯 超人도 아니다. 자신의 가르침이 ‘군중’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괴로워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심적 갈등 묘사 장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개인의 안락과 행복만을 추구하며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마지막 인간’ 그 다음 단계의, 인간성의 고양이라는 당위적 연장선상에서의 속성을 갖는 그런 존재란 느낌을 문맥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니체라는 인간 또한 강한 존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가도 철저히 부정하고, 사회에서 존경받는 층도 철저히 부정하고, 또 무엇보다도 자신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군중’을 비난하며, 오직 ‘진실’을 들려주려 했던 그가 받은 대접은 그저 맹랑한 소리나 읊어대는 허무주의자요 이단자요 미친 사람 고작 그 정도였다. 더구나 그의 사후에도 한 동안은, 열렬한 나치주의자였던 그의 누이의 ‘입맛에 맞는 편집’으로 민족주의와 전쟁을 부추겼던 사람으로 오해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비난은 계속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에 극구 반대했던 그의 생각이 그 꼬투리다. 하지만, 비난과 평가가 무슨 소용이랴. 책이란 그저 생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읽는 것일 뿐인데.

by 작은새 | 2011/03/02 01:25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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