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 Brown의 ‘The Lost Symbol’

다빈치 코드의 작가가 쓴 이 책. 아마존에 들어갈 때마다 눈에 띄던 이 책. 요란함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고나 할까, 아직 그 책은 읽지 못했지만, 왠지 그냥 이 책은 읽고 싶었다.

그래서 나오자마자 주문했고, 이 두툼한 책을 받자마자 기대에 차서 읽기 시작했다. 빙고! 그렇지! 책이란 것은 이래야지! 글의 흐름도 좋고 짜임새도 단단한 것이 물건 하나 확실한 것 건진 느낌이다. 경기병 서곡이 울려퍼지는 듯 시인과 농부가 흐르는 듯, 바둑돌이 놓여가는 그 모양새가 곧 이세돌과 뤼나이웨이의 한판 대결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다. (그래서, 아차하며, 다빈치코드 페이퍼백 주문까지 넣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중반에 들어서니, 뭔가 좀 이상해진다. 흐름의 속도가 더해지는 듯싶은데, 아직도 Freemason이 어쩌니 Noetics가 어쩌니 ‘강의’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깊이도 없고 전혀 과학적이지도 않은 용어들이 난무한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방망이를 마구 휘두르는 꼴이요, ‘깊이’도 없고 ‘틀’도 없이 바둑돌이 쏟아지는 형국이다. 이게 뭐지?

책 끝부분의 반전은 정말 ‘압권’이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반전. 어떻게 이렇게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반전을 집어넣을 수 있지? 차라리, 이런 극적인 ‘내용반전’이 아니라 ‘장면반전’이면 그래도 ‘스토리’가 살았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반전 후의 이야기들은, 이게 소설인지 아니면 술 취해서 늘어놓는 횡설수설인지, 그냥 Blah blah blah...... 아까운 외화를 낭비했다는 자책감만 엄습한다.

좀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위키에 따르면 다빈치코드가 8000만부 넘게 팔렸다고 하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억불 넘는 수입이 작가에게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또 유튜브를 보니 이 작가가 새로운 작품 ‘Solomon’(이 The Lost Symbol의 주인공 이름이 솔로몬)을 쓰고 있다는 ‘뉴스’가 이미 2년 전에 나왔다. 그렇다면, 그 재력으로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을 충분히 고용해서라도 더 ‘치밀하게 과학적인’ 데이터를 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시간이 급할 것도 없었으니, ‘편집자’들과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이야기의 짜임새를 더 다듬을 수 있지 않았을까? 좀 폭 넓은 ‘은밀한’ 서클(물론 엄격한 NDA를 쓰게 하고서라도)에 미리 돌려 피드백이라도 받았더라면 이런 ‘졸작’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by 작은새 | 2009/10/24 00:59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0)

Günter Bentele의 '소설로 만나는 중세이야기'

샤를마뉴 대제가 유럽을 통일하고 아헨에 프랑크 왕국(또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를 세웠던 그 당시부터 페스트가 창궐하던 암흑기 사이의 중세역사를 다룬 책이다. 책 제목이 ‘소설로 읽는....’이라고 되어있어서, 일종의 대하소설 분위기가 아닐까하는 기대로 책을 잡았는데, 그렇지는 않고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토픽을 잡아 그 테마를 클로즈업시켜 이야기를 꾸며나간 그런 책이다. 말하자면 유럽역사를 YouTube로 보는 그런 식이라고나 할까. 책의 원제목을 보니 ‘Augenblicke der Geschichte. Das Mittelalter’. 직역을 하자면 ‘중세역사의 순간들’ 뭐 정도가 될 텐데, ‘소설’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더 매력적이라고 출판사에서 생각한 모양이고,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것이 들어맞은 셈이다.

저자는 교황을 호위했던 병사, 영주들 핍박 아래의 농민, 약탈자로 전락한 기사, 왕의 주치의, 알프스 산을 넘는 무역 길에 따라나선 짐꾼, 편지를 주고받는 남매 또 연인 등으로 화자의 입장을 바꿔가며, 중세에 치열했던 왕권다툼, 교황과 황제의 권력쟁탈전, 십자군 전쟁 등의 ‘큰 사건’들은 물론, 당시의 힘없는 농민들 또 수도사의 생활들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을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동화나 우화 같은 분위기에서 전해주려 애쓰고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곰브리치의 역사책 비슷한데 ‘민중의 눈에 보인 이야기’로 풀어썼다는 점에서 그 근본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몇 가지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 책의 중간 중간에 인쇄상태가 아주 불량한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점이고, 세련되지 못한 번역으로 문장이 덜컹거리는 것 또한 불만족스러운 점이었다.

by 작은새 | 2009/10/13 17:58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0)

Arthur Conan Doyle의 ‘The Return of Sherlock Holmes’

'The Adventures of Sherlock Holmes(1892)'를 읽은 지 얼마 안 되어 좀 나중에 읽을까 생각했는데, 어쩌다 손에 잡고 말았고, 결국 이 1904년판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다른 책은 다 젖혀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차분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산뜻하게 정제된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을까. 마치 현대음악에 찌든 귀를 브람스나 리스트의 소곡들로 달래주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이 책이 쓰인 것이 1904년이니 그때는 다 그랬을까.(하긴 단편소설 모음이라는 그 성격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 읽었던 단편소설 모음집의 다른 작가의 작품들에서는 그런 산뜻함을 느끼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

공부하기 힘들다 느껴지던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이 책을 쓴 사람이 있을 것 아닌가. 또 여기 실린 내용을 처음 알아내었던 더 앞선 사람이 당연히 있었을 테고. 그런데 뭐 겨우 이해가 되느니 안 되느니? 발명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또 그 이야기를 남에게 들려주고자하는 사람은? 그렇다면 내가 그 발명자요 내가 그 전달자라면? 어떻게 하면 읽는 사람이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쓸 수 있을까. 그렇게 ‘입장 바꿔 생각해봐’를 시작한 다음엔 어떤 책을 읽어도 저자와 같은 ‘급’에서 ‘편안하게’ 공부를 즐길 수 있게 되었던 그 옛 생각이.

이 산뜻한 책을 읽으며, 또 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160년이 된 에드가 알렌 포우의 소설들을 읽으며 생각한다. 내가 추리소설을 꾸민다면? 요즘 흔하게 보듯이 그저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이것저것 다 들먹이며 이야기 질질 끌다가, 끝 부분에 가서야 어이쿠 하며 그 동안 이어져왔던 스토리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갑작스런 반전을 집어넣으며 ‘자기 흥분 상태’에서 쓰는 그런 소설이 아닌 멋진 이야기를 꾸미려면?

흥미를 끄는 테마를 곁들인 사건 하나를 잡고(생각해내고), 그 이야기의 맥이 ‘빈틈없이’ 이어져가도록 ‘사건일지’를 가지런히 정리할 것(물론 메모 형태로). 이 ‘그림’을 퍼즐놀이에 적당한 크기와 모양으로 구분하여 잘라낼 것(물론 그 조각조각 자체가 하나의 ‘그림가치’를 갖도록 할 것). 놀이참가자의 흥미를 돋우도록 그 조각들을 잘 섞을 것(물론 독자가 너무 어지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이제 그 ‘새로 형성된 새 순서’에 따라 ‘새로’ 세밀하게 다듬어나가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것(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사건의 본질과 상관없는 주저리주저리 따위를 넣지 말 것). 하지만 내 아무리 그렇게 한다 해도, 아서 코난 도일의 그 차분하고 정교하게 복선을 깔아놓는 그 천부적 재능을 감히 흉내나 낼 수 있었겠나. 모처럼 오랜 만에 ‘읽는 즐거움’에 흠뻑 빠질 수 있었던 그 자체가 행복 아니었던가.

by 작은새 | 2009/10/08 08:07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0)

市川宏와 杉本達夫의 ‘불멸의 인간학, 史記’

지금까지 司馬遷의 史記를 이 편집자 저 편집자의 여러 버전으로 읽었지만, 이번에 손에 잡은 이 일본인들이 편집하고 MOIM이란 곳에서 번역한(아직은 총 7권 중 2권까지만) '불멸의 인간학, 사기'는 색다르게 산뜻한 맛이 있어 아주 마음에 든다. 먼저 개괄적인 요약그림을 보여준 다음 개별사건 하나하나를 풀어가는 식의 그 구성, 또 필요한 곳에 보기에 편한 글자크기와 색깔로 달아놓은 주석, 가끔 달려있는 전혀 과장됨이 없는 '평가', 이런 점들이 모여 '읽고 이해하기에 편한' 책을 만들어내었다.(마치 일제와 국산품을 놓고 그 치밀성과 user-friendliness를 비교하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지만, 그래도 역사서라는 객관성을 중요시하는 책을 읽으면서 감정에만 매달릴 수 없는 일 아닌가.)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2100년 전이라는 그 오래 전에 어떤 '불행을 겪은 사람'이 쓴 이 책을 왜 그렇게 읽고 또 읽는지. 와신상담이니 합종연횡이니 하는 그런 '영화에서도 보고 다른 책으로도 수없이 접했던' 그런 옛날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중국이라는 거대국의 그 '웅장한 역사적 사실 모음'으로 가득한 本紀의 기록을 '탐구'하는 재미로? 아니면 그 世家와 列傳의 그 '미세한 인간심리'도 놓치지 않는 인간관찰기록이 그토록 매력적이라? 솔직히 모르겠다. 그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언제나 접하는 '똑 같은' 내용이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그 사실이다. 글쎄, 아마도 거기에 담긴 시대정신과 그 속을 살아가던 인간군상의 모습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반복되는 '아직 유효한 드라마'처럼 느껴지는 그런 점 때문이라고나 할까.

史記를 읽을 때 마다 생각나는 말. 서양고전에서는 역사와 문학 또 철학 이런 구분이 가능하지만, 동양(물론 중국)고전에서는 史文哲이 분리된 것이 하닌 그저 一體일뿐이라 하는 그 말.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 거의 쇼크처럼 우리의 일상에 다가오는 오늘. 이런 史記 또 三國志니 楚漢志니 하는 그런 인간적 면모가 짙게 담긴 대서사시를 생활철학의 일부로 삼고 살아가는 그 중국인들과 우리의 대비를 생각한다.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서양사람들이 만든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멘털리티와 동양식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멘털리티 대결구도에서라면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하는지.....

 

 

by 작은새 | 2009/10/06 17:51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0)

이무열의 ‘러시아 역사’

테마별로 구분해 다이제스트 형태로 엮어낸 ‘맛보기 성격’의 러시아 ‘역사 소개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줄거리만 겨우 요약해놓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읽고 나서 마치 그 대서사시 자체를 다 읽은 것처럼 흐뭇함을 느끼는 그런 착각이라고나 할까. 그 민초들이 ‘민족적 후진성’이라는 멍에에 겪어야만했던 ‘운명적 고통’, 어지럽게 반복되는 ‘격동’과 ‘후유증’, 또 그 사이사이 예술로 승화된 싹을 틔웠던 ‘민족문화’... 더구나 이 러시아야말로 ‘그 어떤 나라’가 아니라 지금도 세계사의 한 축을 이루는 ‘실제로의 힘’으로 존재하는 ‘실제적 강국’ 아닌가. (나라의 힘이 꼭 경제지표상의 숫자만은 아니지 않은가.) 아는 것이 전혀 없었던 ‘그쪽’에 대해 피상적이나마 어느 정도 ‘연결된 그림’을 얻을 수 있었던 값진 기회였다.  

‘열등한 민족’이란 무엇인가. ‘전체’를 들먹이지만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 존재’들에게 있어서 ‘우리’란 개념의 한계는 어디였을까. ‘누리는 자’와 ‘누리려 애쓰는 자’들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자’들 위에서 꾸려가는 그 세계. 지옥과 연옥 속의 인간군상. 희망과 신기루. 본질과 환상. 작용과 반작용. 관성의 힘. 뒤집히는 듯 다시 제자리, 그리고 또 다시 뒤집히는 듯.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바로 이 ‘불변의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사회주의를 미화시키려는 ‘필요성’에 따른 측면도 있었겠지만, 러시아의 역사에서 그 현상은 떠 또렷하게 나타나고..... 때로는 ‘죄와 벌’의 그 독 품은 주인공이, 때로는 ‘닥터 지바고’에서의 검은 외투 속 안경잡이가, 때로는 ‘1812년 서곡’ 끝부분을 가득 채우는 대포소리가 머릿속을 채운다.(사실 이런 다이제스트 성격의 편집에서는 그런 연상적 그림을 심어 넣으며 스토리 전개에 생동감을 실어주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을 텐데....)  

세 차례에 걸친 그곳 방문. 몸에 경련이 일어나도록 걷고 또 걸으며 ‘모험’까지 겪었던 모스크바. 뻬쩨르부르크를 거쳐 지금은 자유를 만끽하는 에스토니아와 폴란드를 지나가던 그 환상 같기만 했던 여행. 크라스노야르스크와 이루크츠크를 거쳐 몽골을 향하던 ‘세모꼴’ 여행. 지금도 책꽂이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저 러시아어 책, 사전, 그리고 CD뭉치. 그래서 그런지 더욱 이 민족 이 나라가 ‘슬픈 존재’로 내게 다가온다.  

또 이건 웬 일일까. 스케일을 달리한 ‘모형도’의 그림이 자꾸 오버랩 되며 ‘슬픈 느낌’이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은. ‘목적의식을 가진 전체’를 꾸리며 ‘조직적 움직임’을 일으킨다면 경제부흥(적어도 통계수치상)은 아주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도 경험한 적이 있고, 혁명이라는 그 단어의 참뜻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바른 길’로 들어서보려는 시도도 여러 번 있었지만, 얼마나 번번이 그 ‘공동체적 운명’이라는 상위개념이 옹졸한 ‘비교우위의 자기 것 지키기’라는 하위개념에 얼마나 쉽게 무너지곤 하는지.....

by 작은새 | 2009/10/04 10:03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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